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다시 태어나도 우리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흥미로운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고승이 환생하여 다시 태어났다고 믿겨지는 임포첸과 그를 돌봐주는 나이 지긋한 승려. 승려는 어린아이가 임포첸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그리고 전생에 임포첸의 사원이라고 믿어지는 티벳까지 장장 3000킬로미터의 여행을 시작한다. 오로지 임포첸의 말을 믿고, 그를 위하여.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이 둘은 정상은 아니다. 어느 독일인의 감상처럼 어쩌면 둘은 정신이 나간 것일 수도 있다! 서양 이성의 눈으로 그들은 신화속 세계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고해 보면 대부분의 종교 창시자들은 이 임포첸과 그를 따르는 승려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합리적인 이야기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인간 내부에는 있다. 그런 모습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끊임없이 재현된다. 다만,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은 시대별로 달라진다. 예수나 무하마드가 현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영화의 주제는 물론 이러한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제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임포첸을 따르는 고승의 사려깊은 눈망울은 우리 시대가 오랫동안 잊었던 그 무엇이다. 담담히 이야기했던 고승은 임포첸과 결국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이 영화의 전부이다. 나는 그것을 쉽게 우정이고 사랑이라고 운운하지만- 이 고귀한 눈물은 그렇게 쉽게 범주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퍽 먹먹한 영화이다.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소환으로서의 종교 : 예수

세상사의 진리는 없다. 있다면 사람들 사이의 동의만 있을 뿐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의 옳고 그름, 선과 악, 미추는 사람들의 평균에 수렴한다. 일부의 엘리트들은 자신만의 전문성에서 그러한 상징체계를 정교화하고 대변할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 인간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신이란 개념 또한 그러하다. 속세를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의 정확한 개념을 나는 모른다. 다만, 나를 벗어난 사람들은 그러한 존재의 후보자를 알고 있고 그 중 하나는 예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비신자에게도 충분히 알려져 있다. 그를 잃은 12제자와 여인들의 고통은 2000년이 지나 우리에게도 알려져있다. 예수는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였으나,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개념을 고안해 내었고, 기독교전통에서 결국 '신'이라고 호명되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신의 개념을 다시 생각한다. 이제 우리 시대의 신은 교부학자들의 신과는 달라 보인다. 신의 존재는 토머스 아퀴나스 식의 논리적이고 귀납적인 논증으로 증명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이 존재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으면(사회과학적인 표현으로 간주관성)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시대는 묵시론적인 위험, 절망, 고통으로 넘쳐나니, 아마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인간들은 2000년 전에 숙명적으로 죽어간 한 인간을 기억해내고, 제도로서의 종교의 해설이 곁들여지면 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어떤 이는 죽음으로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예수는 죽었지만, 매순간 다시 태어나고 있으며 가톨릭 미사에서 이야기하듯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린다. 왜냐하면 매시대 인간들의 선택을 받기 때문이다. 신은 2000년전에 죽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소환된다. 그는 부활하며, 인간들은 스스로 그를 신이라고 <소환한다>. 그러한 믿음은 공고해지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하며, 역사에 참여한다. 그는 살아있는 누구보다도 영향을 끼치며 우리의 시대에 참여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신>의 개념이다.  박제되지 않고, 영원히 기억속에 남아 살아 있는 어떤 존재. 어찌보면 나는 예수가 진정 신이라고 믿겨진다.

2017년 11월 6일 월요일

좋은 글에 대한 단상(2)

모든 글쓰기는 상처에서, 열등감에서, 패배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누군가는 피로 쓰여진 것만 읽는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좋은 글은 쉽게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는 글은 선호하지 않는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 글을 쓸 수는 없다. 오히려 좋은 글은 그냥 써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은 그 자체적으로 씌여진다. 좋은 글을 구별하는 것은 쉽다. 좋은 글은 자체적인 생명력이 있다. 그 글은 작가와 엄격히는 다른 존재이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의 뇌는 사로잡힌다. 그 글은 자꾸 생각나고 불편하게 하고 고생시킨다. 25세기 뇌 과학이 발달되어 부분적으로 뇌를 바꿀 수 있을 때, 그들은 이해 할 것이다. 가장 좋은 뇌 수술의 메스는 좋은 글이라는 것을. 좋은 글로 인간 개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로 변해 갈 수 있다는 것을..

발레리안 : 프랑스적인 SF 영화

마블을 비롯한 미국의 영화제작자들은 어떤 공식을 만들어 낸 것 같다. 그 공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90년대 해리슨포드의 액션영화처럼 더 이상은 유치하지 않다. 재미있고 시간이 잘 가며, 약간의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그 약간의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은 철학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 너무 오락적이기만 한데?'라는 반문을 무마시킬 정도로만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스타일이 완성된 것 같은데, 최근의 여러 헐리우드 SF를 보면 이 생각은 더욱 확고해 졌다. 라그나로크, 가디언즈오브갤럭시 같은 영화들으르 보면 <미국적>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SF 영화에서도 문화적 다양성은 중요하다. 나는 보지 않았지만, 심형래의 SF영화인 용가리를 많은 한국인은 보았다. 그것이 설령 <국뽕>일지라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충무로는 SF 장르는 손 뗀지 오래되었고, 우리는 우아하게 용가리를 비평하였지만, 한국적인 SF는 동시에 고사되었다. 
   
이 지점에서 발레리안은 특징이 있는 SF 영화다. 이 영화의 특징을 나는 <프랑스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는 과잉된 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군더더기가 사라진-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계산된 미국식 SF와는 다르다.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고, 많은 장면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10,000원을 낸 관객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했으며, 사상과 그 사상의 느낌을 공유하려고 했다. 이것은 오히려 유럽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매일 버거킹의 익숙한 향만 맛다가, 맛있는 크로와상을 먹는 느낌. 물론, 이 영화는 크로와상은 아니지만. 

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가치

사회적경제 진영에 있은지 3년이다. 이 안에서는 유용한 단어 하나를 배웠다. 그것은 <가치>이다. 현 경제 시스템에 대한 날선 비판과 대등하게, 아니 오히려 옹호론이 많은 이유는 이 시스템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보상한다는 주장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화폐로서 측정되는 <가치>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또 강제하는 최후의 저지선이다. 이 경제시스템에서 개체들은 알게 모르게 이 추상적인 <가치> 창출 혹은 도움을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 방법과 양태는 무한하지만, 그들의 캐치프레이는 동일한다. <가치 창출>
 
성공적인 사업의 시작도 이 <가치>추구 에서 출발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은 금방 좌절할 수 있다. <가치> 추구야 말로 자신의 일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나란 인간은 이해되지 않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수영을 배우거나 운전을 배울때도 이론을 공부한 후에야 가능했다. 늦었지만 게임의 규칙을 배운 것 같다. 이것이 내가 얻은 최근의 수확이다.

가면

적어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는 태어나기 전에는 없었다. 어느 순간 존재하고 곧 사라질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실을 거의 매순간 잊고 지낸다. 이것는 난센스다. 존재는 당연하지 않다. 그가 존재하는 것은 아주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그것도 순간뿐이다. 그런데 그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석연치 않은 인과관계로 생겨난 스스로의 존재를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난 인간의 이런 처연스러움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삶을 연기하는 허무한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은 그리하여 무엇인가를 발명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2017년 10월 14일 토요일

미래를 도모하며 : 50+ 플러스의 시간

37살이다. 사회생활한지 10년이 되었다. 대학 졸업이후 첫직장 5년, 대학원 2년 반, 그리고 두번째 직장 2년반, 이렇게 10년. 50이란 숫자는 이제 멀지 않아 보인다. 금새다. 내가 알고 있던 90년대 후반들은 이미 40대로 넘어갔다. 그들은 50대를 준비하고 있다. 나도 곧 그럴 것이다.
 


책을 읽었다. 혁신파크의 한 식구로 있는 <50+> 가 교육행사를 많이 하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적으로 읽어본 것은 처음이다. 내용은 당연히 오십대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이다. 여러명의 저명인사가 강의 한 내용을 받아쓰기 한 것이다. 내용은 참신했다. 삼십대 후반에 접어든 내게도 유용했다.
 


첫번째로 홍기빈씨의 강의가 좋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의 4 사이클로 삶을 규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이클은 시대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며, 21세기의 이런 관점은 유효하지 않다. 홍기빈씨는 자신이 40대 후반인데 자신의 몸 컨디션이 술 많이 먹었던 20대보다 좋다고 생각한단다. 맞는 말이다. 비슷하게 우리 사회의 '동안' 열풍의 근원은 <더 이상 늙어 보이지 않는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도 생물학적으로 젊은 사람들과 무리없이 경쟁할 수 있다. 이 현상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지만, 팩트차원에서는 논란이 없는 말일 것이다.
 


홍기빈씨는 그래서 노년 대신 제2의 중년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우리는 죽기 직전의 노년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두번째 중년을 준비해야 하고, 그 시기는 60대부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3,40 대는 오히려 확장된 교육의 시기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확장된 학습은 경제학자답게 '가치 생산'의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더 이상 성실은 미덕이 되지 않는다. '가치 생산' 만이 우리 경제시스템에서 인정해 줄 것이라는 이야기다.
 


어찌보면 간단한 말인데, 나는 이 주장에 쾌감을 느꼈다. 가치 창출이란 세상을, 사람을 이롭게 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전혀 없던 것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작은 프로세스를 바꾸거나,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을 통해서도 만들수 있다.
 


최재천씨는 강의도 좋았다. 생물학자 답게, 진화학에 근거하여 주장한다. 번식기 이후의 삶을 통해 인간 사회는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번식기 이후의 삶을 위해 '기획 독서'를 하자고 주장한다. '기획 독서'의 반대말은 '취미 독서'이다. 그러니깐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힘들게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가 '기획 독서'인 것이다. 그동안 '취미 독서'만 줄기차게 했던 스스로가 미안해졌다.
 


어쨌든 두 명의 강사(홍기빈, 최재천)가 이야기 해준 내용은 사회 생활 10년 차인 내게도  울림이 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참에 좋은 책을 만났다. 특히 홍기빈 씨는 삶의 주요 요소마다 내게 가르침을 준다. 

2017년 10월 7일 토요일

지식 유통 채널의 혁명

지식 유통 채널의 혁명! 이제 나는 책을 읽지 않는다. 팟캐스트와 위키, 유투브를 통해 세상의 지식을 얻는다. 그 매체들은 공짜이고, 문어체 대신 구어체를 사용한다. 그들은 구텐베르크의 후손은 아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구글, 김어준이다.


그들은 현상을 외부적 시선에서 관찰하여 건조한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 자체에서 활동하여 얻은 지식을 친숙한 언어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것은 혁명이다! 우리 세상 자체는 더 이상 지식인이라는 거추장한 대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은 모두에게 주어진 스마트폰을 통해 직접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아고라 장에서는 학위, 배경 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 촌놈 겁주는 식의 고답적인 문법은 선비질이라고 야유 받는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사상(philosohy) 시장>의 변화는 이것이다. 컨텐츠의 내재적인 경쟁력 외에 나머지 요소는 부가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떠들기'와 같다. 누구나 어쨌든 떠들어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며, 오히려 무능력에 가깝다.

세대 전쟁

뉴스를 보니 취업준비생들이 인적성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추석에도 못 쉬었다고 한다. 12초 내에 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준비자를 단순 걸러내기 위한 시험을 위해 연휴를 포기하는 산업예비군들.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낄지 궁금하다. 사회 진출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절차를 불가능에 가깝도록 만든 40대 이상의,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시대는 변하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노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은 상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젊은 세대가 감수해야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은 불편하다.

그들은 공짜 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일 할 기회를 달라고 할 뿐이다. 하지만 당신들이 만든 이 우아한 경제 시스템은 이마저도 힘들다고 고개를 젓는다.

세대전쟁. 젊은 사람을 나이 든 사람들이 판단한다. 그들이 단지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조직에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입장벽을 점점 높였고, 사회 생활을 하고 싶은 이들은 간택되기 위해 12초에 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의문을 갖지 않고 각자도생을 도모한다. 모두 당연하다고 믿기에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된다. 세상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다. 도시는 밤에도 빛나지만 왜 빛나는 지는 대부분 궁금해 하지 않

2017년 10월 4일 수요일

아이캔스피크 : 연애편지 쓰는 방법

아이캔스피크는 능구렁이 같은 영화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재는 영화 중반에서야 나온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다. 그럴듯한 인물과 시나리오가 억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연애편지를 읽는 것 같다. 좋아한다라는 말은 하나도 없지만, 그 느낌이 금새 느껴진다. 처음에는 코믹영화였지만 어느새 역사극이 된다. 이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나문희, 이제훈의 주연 연기도 좋았지만 진정한 secne steale가 따로 있다. 진주댁의 '염혜림'. 처음보는 페이스지만 그녀의 투박해 보이는 슈펴집 연기는 최고였다. 마지막엔 눈물도 쏙뺀다. 최고의 능구렁이이다.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같은 소재를 영화화한 꽃길도 좋았지만, 나는 부담스러웠다. 예수를 다룬 패션오브크라이스트도 좋았지만,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에서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벤허이다. 벤허와 아이캔스피크의 공통점은 돌려차기이다. 직접 말하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해주기. 작가는 연애편지를 많이 써본 듯하다.

2017년 10월 3일 화요일

<사회적경제>라는 말

우리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경제>를 구분할 수 있을까. 예전에 대학원에 다닐 때만 해도 사회적경제를 특정 영역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제도적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구분한 협동조합,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자활 등이 하는 경제적 행위를 사회적경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구분은 여전히 제도적으로 유용하다. 특히 국가기관이 이런 제도적 구분을 하지 않은 채로 통치활동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경제>의 참여 주체를 가위처럼 오려내서 생각할 순 없다. 사회적경제는 오히려 기존의 시장 경제, 국가 경제와 구분되는 원리로 작동되는 경제 생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어느 집단의 전유물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다른 집단은 배척되는 것이다. 공짜 술 안주를 받을 때 나는 이것도 사회적경제라고 생각한다. 삼성의 으리으리한 사회공헌활동도 사회적경제이다. 속마음은 홍보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증여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여러 층위의 경제 활동은 다른 스펙트럼으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경제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 주장에 반대할 것 같다. 가치와 수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냐는 예상 반론. 아주 흔한 설명 방법으로서 '고용을 하기 위해(목적, 가치), 빵을 만든다(수단, 즉 경제활동) '는 오래된 사회적경제의 캐치프레이를 말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목적이 우선시 되는 활동은 사회적경제에 더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빵을 만들기 위해 고용을 하는 경제 개체의 순 기능을 무시할 수 있을까. 이런 활동을 무시하는 경우 사회적경제는 기업의 사회적책임이라는 어젠다 선점에서 패배한다.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묵주기도를 하며

요즘 하루 한번은 묵주기도를 하려고 노력한다. 영린이가 내년에 곧 변호사 시험을 보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지향하는 기도이다. 묵주기도를 하면 세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첫번째는 종교적 경험이다. 기도는 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오랜 전통은 그 기도조차 전형화 하는데 성공했다. 묵주기도에는 <신비의 기도>가 있다. 이 신비의 기도를 읽을 때 나는 종교적 냄새를 강하게 맡는다. 특히 <신비의 기도> 중 '영광의 신비'가 그렇다.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은 내게 이 파트는 신화처럼 느껴진다.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북한의 방송에서 나이 들은 중년의 앵커가 그들의 최고 존엄을 지칭할 때 꼭 이런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 존재는 뿌연 신화적 장치를 거두어 두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같다. 북한의 주민에게 김씨 일가가 그렇다. 가톨릭인들에게도 비슷한 매커니즘이 있다. 그 두 집단은 원치 않았겠지만, 서로 닮았다. 양 종교(북한, 가톨릭)의 기호학적 유사성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두번째는 명상적 경험이다. 묵주기도는 같은 기도문을 반복한다. 몇 번 하다보년 자동 크루즈처럼 아주 편하게 기도를 할 수 있다. 이때 나는 내 생각의 드나듬을 여실하게 본다. 그렇다. 나는 생각의 주체가 아니다. 생각은 어찌하여 나를 통과하여 반복한다. 어떤 생각은 반복되고, 어떤 생각은 강화되고, 어떤 생각은 점점점 소멸한다. 그 과정을 또 다른 나, 즉 메타 자아는 응시한다. 결국 인간의 생은 생각의 합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합의 미시적인 모습을 관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묵주기도는 적당하다. 일종의 만트람적 기능을 한다.


세번째는 인간적 경험이다. 나는 사실 신화나 종교를 믿는 인간은 아니다. 예전하는 그것들에 대해 유희하는 태도를 지녔었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묵주기도를 하면서 드는 확신이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확신. 강한 존재, 우리 주변의 강아지, 고양이, 기타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연약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기도를 한다. 그들의 상처와 욕망이 뒤범벅된 무엇을 투사하기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기도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맨얼굴을 본다. 그것은 아름답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한다. 기도는 나약한 인간을 전제하지만, 어떡하는가. 인간이기에 나는 기도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2017년 9월 23일 토요일

2017년 9월 23일

오늘 쿠슈부에게 미뤄두었던 편지를 썼다. 그림을 꼭 보내주는 데 참 귀엽다. 이번에는 우산을 그려 주었는데 썩 잘 그리는 것 같다. 내년에 네팔을 갈 수 있는데 보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영린이가 앞에서 공부를 한다. 영린이가 잘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7년 9월 18일 월요일

자판기 산날

오늘은 쿠팡에서 휴대용 자판기를 샀다. 세계여행을 갈 때 필요한 자판이다. 이 자판으로 여행가서 생각을 쓸 생각이다. 영린이가 필요하다면 빌려줄 용의도 있다. 맥루한이 말했듯이 매체는 곧 메세지이다. 난 이 작은 자판기를 통해 내 생각을 잘 정리하면 좋겠다. 이 자판기가 내 신체에 어서 적응할 수 있도록 빨리 연습해야겠다.

2017년 7월 19일 수요일

거품

우리의 모든 것은 대부분 흘러가고, 어떠한 당위나 목적도 없다면... 세상은 거품과도 같지 않을까. 말하는 것도 글쓰는 것도 내 마음 같지 않고, 적당한 단어도 사실 부재하고... 막연히 하얀색 거품을 연상하며 쓰는 글일 뿐... 세상 만사에 대한 은유로서 거품 만한 것도 없을 것 같다. 누군가는 거품에서 광학적 사실을 확인할 수도 있고, 돈을 벌 생각도 할 수 없겠지만... 한없이 가벼운 거품은 날아 다니다 스러진다. 세상도 그 거품에 반사되어 비치다 금새 꺼진다...

생각의 반복

무엇으로 인간을 일하게 만들것인가라는 생각을 또 하였다. 이것은 처음이 아니다. 생각을 기록하기 위하여 블로그에 오랜만에 왔다. 확인해 보니 그 생각은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동일한 생각의 루프안에 나는 갇혀 있던 것이다. 생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인데, 나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원한다면 서적 등을 찾아 볼 수도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