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가치

사회적경제 진영에 있은지 3년이다. 이 안에서는 유용한 단어 하나를 배웠다. 그것은 <가치>이다. 현 경제 시스템에 대한 날선 비판과 대등하게, 아니 오히려 옹호론이 많은 이유는 이 시스템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보상한다는 주장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화폐로서 측정되는 <가치>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또 강제하는 최후의 저지선이다. 이 경제시스템에서 개체들은 알게 모르게 이 추상적인 <가치> 창출 혹은 도움을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 방법과 양태는 무한하지만, 그들의 캐치프레이는 동일한다. <가치 창출>
 
성공적인 사업의 시작도 이 <가치>추구 에서 출발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은 금방 좌절할 수 있다. <가치> 추구야 말로 자신의 일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나란 인간은 이해되지 않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수영을 배우거나 운전을 배울때도 이론을 공부한 후에야 가능했다. 늦었지만 게임의 규칙을 배운 것 같다. 이것이 내가 얻은 최근의 수확이다.

가면

적어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는 태어나기 전에는 없었다. 어느 순간 존재하고 곧 사라질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실을 거의 매순간 잊고 지낸다. 이것는 난센스다. 존재는 당연하지 않다. 그가 존재하는 것은 아주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그것도 순간뿐이다. 그런데 그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석연치 않은 인과관계로 생겨난 스스로의 존재를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난 인간의 이런 처연스러움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삶을 연기하는 허무한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은 그리하여 무엇인가를 발명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2017년 10월 14일 토요일

미래를 도모하며 : 50+ 플러스의 시간

37살이다. 사회생활한지 10년이 되었다. 대학 졸업이후 첫직장 5년, 대학원 2년 반, 그리고 두번째 직장 2년반, 이렇게 10년. 50이란 숫자는 이제 멀지 않아 보인다. 금새다. 내가 알고 있던 90년대 후반들은 이미 40대로 넘어갔다. 그들은 50대를 준비하고 있다. 나도 곧 그럴 것이다.
 


책을 읽었다. 혁신파크의 한 식구로 있는 <50+> 가 교육행사를 많이 하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적으로 읽어본 것은 처음이다. 내용은 당연히 오십대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이다. 여러명의 저명인사가 강의 한 내용을 받아쓰기 한 것이다. 내용은 참신했다. 삼십대 후반에 접어든 내게도 유용했다.
 


첫번째로 홍기빈씨의 강의가 좋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의 4 사이클로 삶을 규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이클은 시대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며, 21세기의 이런 관점은 유효하지 않다. 홍기빈씨는 자신이 40대 후반인데 자신의 몸 컨디션이 술 많이 먹었던 20대보다 좋다고 생각한단다. 맞는 말이다. 비슷하게 우리 사회의 '동안' 열풍의 근원은 <더 이상 늙어 보이지 않는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도 생물학적으로 젊은 사람들과 무리없이 경쟁할 수 있다. 이 현상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지만, 팩트차원에서는 논란이 없는 말일 것이다.
 


홍기빈씨는 그래서 노년 대신 제2의 중년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우리는 죽기 직전의 노년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두번째 중년을 준비해야 하고, 그 시기는 60대부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3,40 대는 오히려 확장된 교육의 시기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확장된 학습은 경제학자답게 '가치 생산'의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더 이상 성실은 미덕이 되지 않는다. '가치 생산' 만이 우리 경제시스템에서 인정해 줄 것이라는 이야기다.
 


어찌보면 간단한 말인데, 나는 이 주장에 쾌감을 느꼈다. 가치 창출이란 세상을, 사람을 이롭게 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전혀 없던 것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작은 프로세스를 바꾸거나,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을 통해서도 만들수 있다.
 


최재천씨는 강의도 좋았다. 생물학자 답게, 진화학에 근거하여 주장한다. 번식기 이후의 삶을 통해 인간 사회는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번식기 이후의 삶을 위해 '기획 독서'를 하자고 주장한다. '기획 독서'의 반대말은 '취미 독서'이다. 그러니깐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힘들게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가 '기획 독서'인 것이다. 그동안 '취미 독서'만 줄기차게 했던 스스로가 미안해졌다.
 


어쨌든 두 명의 강사(홍기빈, 최재천)가 이야기 해준 내용은 사회 생활 10년 차인 내게도  울림이 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참에 좋은 책을 만났다. 특히 홍기빈 씨는 삶의 주요 요소마다 내게 가르침을 준다. 

2017년 10월 7일 토요일

지식 유통 채널의 혁명

지식 유통 채널의 혁명! 이제 나는 책을 읽지 않는다. 팟캐스트와 위키, 유투브를 통해 세상의 지식을 얻는다. 그 매체들은 공짜이고, 문어체 대신 구어체를 사용한다. 그들은 구텐베르크의 후손은 아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구글, 김어준이다.


그들은 현상을 외부적 시선에서 관찰하여 건조한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 자체에서 활동하여 얻은 지식을 친숙한 언어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것은 혁명이다! 우리 세상 자체는 더 이상 지식인이라는 거추장한 대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은 모두에게 주어진 스마트폰을 통해 직접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아고라 장에서는 학위, 배경 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 촌놈 겁주는 식의 고답적인 문법은 선비질이라고 야유 받는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사상(philosohy) 시장>의 변화는 이것이다. 컨텐츠의 내재적인 경쟁력 외에 나머지 요소는 부가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떠들기'와 같다. 누구나 어쨌든 떠들어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며, 오히려 무능력에 가깝다.

세대 전쟁

뉴스를 보니 취업준비생들이 인적성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추석에도 못 쉬었다고 한다. 12초 내에 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준비자를 단순 걸러내기 위한 시험을 위해 연휴를 포기하는 산업예비군들.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낄지 궁금하다. 사회 진출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절차를 불가능에 가깝도록 만든 40대 이상의,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시대는 변하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노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은 상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젊은 세대가 감수해야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은 불편하다.

그들은 공짜 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일 할 기회를 달라고 할 뿐이다. 하지만 당신들이 만든 이 우아한 경제 시스템은 이마저도 힘들다고 고개를 젓는다.

세대전쟁. 젊은 사람을 나이 든 사람들이 판단한다. 그들이 단지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조직에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입장벽을 점점 높였고, 사회 생활을 하고 싶은 이들은 간택되기 위해 12초에 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의문을 갖지 않고 각자도생을 도모한다. 모두 당연하다고 믿기에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된다. 세상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다. 도시는 밤에도 빛나지만 왜 빛나는 지는 대부분 궁금해 하지 않

2017년 10월 4일 수요일

아이캔스피크 : 연애편지 쓰는 방법

아이캔스피크는 능구렁이 같은 영화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재는 영화 중반에서야 나온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다. 그럴듯한 인물과 시나리오가 억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연애편지를 읽는 것 같다. 좋아한다라는 말은 하나도 없지만, 그 느낌이 금새 느껴진다. 처음에는 코믹영화였지만 어느새 역사극이 된다. 이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나문희, 이제훈의 주연 연기도 좋았지만 진정한 secne steale가 따로 있다. 진주댁의 '염혜림'. 처음보는 페이스지만 그녀의 투박해 보이는 슈펴집 연기는 최고였다. 마지막엔 눈물도 쏙뺀다. 최고의 능구렁이이다.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같은 소재를 영화화한 꽃길도 좋았지만, 나는 부담스러웠다. 예수를 다룬 패션오브크라이스트도 좋았지만,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에서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벤허이다. 벤허와 아이캔스피크의 공통점은 돌려차기이다. 직접 말하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해주기. 작가는 연애편지를 많이 써본 듯하다.

2017년 10월 3일 화요일

<사회적경제>라는 말

우리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경제>를 구분할 수 있을까. 예전에 대학원에 다닐 때만 해도 사회적경제를 특정 영역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제도적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구분한 협동조합,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자활 등이 하는 경제적 행위를 사회적경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구분은 여전히 제도적으로 유용하다. 특히 국가기관이 이런 제도적 구분을 하지 않은 채로 통치활동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경제>의 참여 주체를 가위처럼 오려내서 생각할 순 없다. 사회적경제는 오히려 기존의 시장 경제, 국가 경제와 구분되는 원리로 작동되는 경제 생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어느 집단의 전유물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다른 집단은 배척되는 것이다. 공짜 술 안주를 받을 때 나는 이것도 사회적경제라고 생각한다. 삼성의 으리으리한 사회공헌활동도 사회적경제이다. 속마음은 홍보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증여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여러 층위의 경제 활동은 다른 스펙트럼으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경제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 주장에 반대할 것 같다. 가치와 수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냐는 예상 반론. 아주 흔한 설명 방법으로서 '고용을 하기 위해(목적, 가치), 빵을 만든다(수단, 즉 경제활동) '는 오래된 사회적경제의 캐치프레이를 말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목적이 우선시 되는 활동은 사회적경제에 더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빵을 만들기 위해 고용을 하는 경제 개체의 순 기능을 무시할 수 있을까. 이런 활동을 무시하는 경우 사회적경제는 기업의 사회적책임이라는 어젠다 선점에서 패배한다.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묵주기도를 하며

요즘 하루 한번은 묵주기도를 하려고 노력한다. 영린이가 내년에 곧 변호사 시험을 보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지향하는 기도이다. 묵주기도를 하면 세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첫번째는 종교적 경험이다. 기도는 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오랜 전통은 그 기도조차 전형화 하는데 성공했다. 묵주기도에는 <신비의 기도>가 있다. 이 신비의 기도를 읽을 때 나는 종교적 냄새를 강하게 맡는다. 특히 <신비의 기도> 중 '영광의 신비'가 그렇다.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은 내게 이 파트는 신화처럼 느껴진다.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북한의 방송에서 나이 들은 중년의 앵커가 그들의 최고 존엄을 지칭할 때 꼭 이런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 존재는 뿌연 신화적 장치를 거두어 두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같다. 북한의 주민에게 김씨 일가가 그렇다. 가톨릭인들에게도 비슷한 매커니즘이 있다. 그 두 집단은 원치 않았겠지만, 서로 닮았다. 양 종교(북한, 가톨릭)의 기호학적 유사성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두번째는 명상적 경험이다. 묵주기도는 같은 기도문을 반복한다. 몇 번 하다보년 자동 크루즈처럼 아주 편하게 기도를 할 수 있다. 이때 나는 내 생각의 드나듬을 여실하게 본다. 그렇다. 나는 생각의 주체가 아니다. 생각은 어찌하여 나를 통과하여 반복한다. 어떤 생각은 반복되고, 어떤 생각은 강화되고, 어떤 생각은 점점점 소멸한다. 그 과정을 또 다른 나, 즉 메타 자아는 응시한다. 결국 인간의 생은 생각의 합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합의 미시적인 모습을 관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묵주기도는 적당하다. 일종의 만트람적 기능을 한다.


세번째는 인간적 경험이다. 나는 사실 신화나 종교를 믿는 인간은 아니다. 예전하는 그것들에 대해 유희하는 태도를 지녔었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묵주기도를 하면서 드는 확신이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확신. 강한 존재, 우리 주변의 강아지, 고양이, 기타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연약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기도를 한다. 그들의 상처와 욕망이 뒤범벅된 무엇을 투사하기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기도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맨얼굴을 본다. 그것은 아름답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한다. 기도는 나약한 인간을 전제하지만, 어떡하는가. 인간이기에 나는 기도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