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5일 화요일

루저(loser)라는 증거

루저는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판단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패배감에 쩔은 그 사람의 입에선 고약한 암내가 풍긴다. 그것은 그대로 그의 체취가 된다. 아무리 좋은 옷과 향수를 뿌려도 이것을 숨길 수는 없다. He is what he thinks.

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노동 중독자

고백하자면 나는 <무위>를 견디질 못한다. 행복한 백수는 상상속에나 존재하고, 나는 철저하게 노동 지향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석사 학위를 대충 쓰고 남은 6개월 동안 남고 남는 시간에 끌려다녔다. 나는 그 경험을 괴로운 경험으로 기억한다.

이 시대에는 우리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유의 활동, 즉 '직업'으로 판단한다. 이성을 소개 받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물어본다. 가장 후진 대답은 아마 '논다'라는 대답이 아닐까. 그 사람의 배경이 아무리 대단해도, 고매한 인격을 가졌더라도 '노는 사람'에게 우리는 색안경을 끼기 마련이다.

이렇게 노는 것들을 인정 못하는 <노동 중독자>들은 드디어 이 세상을 점령했(었)다. <유위> 하지 않고는 이 시간을 주체 못하는 그들이 좋아하는 말은 <가치>, <성과>, <효과> 같은 것들이다. 세상은 그런 그들에게 박수를 쳐준다. 그들은 점점 올라가서 세상을 자기와 닮게 만들려 한다.

하지만 이 성과 시대는 종언을 고하려고 하는 듯하다. 더 이상 <노동> 가치론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다. 18세기 리카르도 후예자(**) 들 몇몇을 제외하고 더 이상 노동이 우리 사회의 가치를 만든 것이라고 믿을까? 세상은 더 이상 노동자들이 움직이지 못한다. 그 여백은 과학, 기술, 엄청난 시스템 등이 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수없이 많은 <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본 소득 담론은 이제 시대의 가장 핫(hot)한 아젠다(agenda)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숙명 앞에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놀 수 있니? 아쉽게도 나는 산업화 시대의 아들이다. 나는 노동이 더 쉽다라고 고백 할 수 밖에 없다. 어느 정도 노동 중독자이기 때문이다.

** 마르크스도 이 범주에 속한다. 진보 주의자들의 노동 운동에 대한 헛발질은 이 괴리에서
   나온다. 그들은 노동에 대해서 숙연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그것이 없는 세상에
   대해서는 앨러지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진보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추
   종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죄책감 없이 잘 놀고 있는 유형의 인간일 것이다.

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실패한 사회과학 이론들

실패한 사회과학 이론들은 동어반복(tautology), 형이상학, 혹은 음모론일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사회과학 이론들도 위의 3 요소를 조금은 가지고 있다.

시선의 폭력

한 TV 프로그램을 여가 시간에 시청하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은 40세 연배의 남자 연예인들의 어머니가 그 연예인의 일상을 관찰하는 내용이다. 프로는 재미있다. 일반인들과 다를바 없는 한 어머니의 아들로서의 그들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찌질하고, 찌질하고, 참으로 찌질하다.

연예인들의 어머니들은 관찰 화면 중간중간에 감상 코멘트를 날리는데, 이것이 이 프로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미혼인 아들의 일상을 걱정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MC들도 이 과정에 참여하여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연출해 낸다.

아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어머니들과 MC들의 공통의 정서는 다음과 같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특히 남자)는 뭔가 불쌍하다" 이 기본 전제하에서 아들의 여러 생활의 모습은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짠하다고 느낀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그렇고, 티비를 보는 것도 그렇다.

이 프로에서 아들들의 다른 특성과 개성은 휘발되고, 오로지 짝을 못 이룬 사실만 도드라진다. 당사자라면 어쩌면 억울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행동들은 결혼을 한 사람들도 당연히 하는 아주 흔한 일상이다.

예컨대, 인류애적 관점에서는 인간이 만든 모든 코미디(희극)도 비극으로 여겨질 수 있다. 어차피 죽을 것들의 일종의 발악으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처럼 사물을 보는 시선의 방향은 그 사물의 모습을 결정한다. 우리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은 사물을 접하는 즉시 해석하고, 그 해석은 가끔 이렇게 (아주 조금은) 폭력적일 수도 있다. 물론 그걸로 TV 시청자들은 잠시나마 행복해한다.

2016년 10월 18일 화요일

정치지리학자 임동근

많은 사람들이 사실과 당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 진보 성향의 지식인이 이 함정에 빠지는 것을 개인적으로 많이 보았다. 그들은 당위론에 목소리를 높인 나머지 현상의 이면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듯 하다. 그들은 개탄하거나 혹은 음모론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랬다.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노는 하지만 도대체 왜? 라는 질문에는 궁색한 답변밖에 할 수 없다. 이런 내게 정치지리학자 임동근씨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알려주었다. 
   
임동근씨의 핵심 문제제기(일종의 연구질문)는 다음과 같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는 어떻게 통치되는가? 이 질문에 임동근씨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철하지만 차가운 진실(사실)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전월세 대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도시는 빈민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이 권력화 되는 과정을 사실로서 인정하기도 한다. 세상은 그렇다는 것을 그저 인정하고 다음 논의로 이어간다.

그의 이론은 꽤 매력적이다. 세상을 정합력있게 잘 설명해준다. 지식인의 명석함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그의 이론은 쿨(cool)하다. 그는 핫(hot)한 두뇌이다.

2016년 10월 17일 월요일

국가 이미지

국가 이미지 중 극적인 장면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국회 방문을 했을 때 경호원들이 사열하고 있는 이 사진이다. 국가는 일종의 해당 <나와바리>의 <오야붕>이며, 그 안에서 어떠한 권력기관들의 도전도 불허한다. 소지역에서 난다긴다 한다 하는 어떠한 꼬봉도 이들의 공권력에게는 고개 숙인다, 혹은 고개 숙일수 밖에 없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적 국가관을 여실히 보여 준 이 사진


2016년 10월 12일 수요일

프로(Profession)이라는 올가미

프로라는 말은 어쩐지 근사하다. 반대어인 아마추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와는 반대인, 예컨대, 유능하고, 똑똑하고, 책임감있는 직장인이 떠오른다. 프로의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몸값에 해당하는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 싶다. 월급 혹은 연봉은 닝겐들에게 어떠한 마법을 부리는 것일까.

닝겐은 스스로를 만물의 척도라고 자임하지만, 그 위에 화폐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화폐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일을 벌이게 한다. 밤 바다 야광등에 오징어가 매달리듯이, 인간은 화폐 주변에 모여든다. 프로라는 말에는 돈 값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놀랍다. 결국 화폐는 닝겐으로 하여금 진정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일부 닝겐은 화폐를 얻기 위한 수고에서 생기는 모든 지난한 과정을 어떻게든 견딘다(그들은 프로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만한 촉매제가 없을 것 같다. 그 촉매제에 화학적으로 100% 반응하는 닝겐을 프로라고 부른다. 자기 몸 값을 수행해야 한다는 현대의 당연한 상식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화폐가 없는 세상에서는 어떤 것을 위해 일하고, 움직일 수 있을까.

** 아마추어의 말 뜻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예수

니코스 카잔키스키의 <그리스도 마지막 유혹>에서, 카잔키스키는 예수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첫번째는 희망 없음(hopeless)이고 두번째는 두려움 없음(fearless)이다. 그 책에서 예수는 희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헌신한다. 예수에게는 두려움은 없다.

며칠전 문 국장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세월호 이후 우울 증상을 겪었는데, 어떤 계기로 다시 원기를 되찾았다고. 그 계기는 (개선) 가망이 없는 사회적 불의에 온몸을 다해 끝없이 저항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들 덕분에 본인은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이말을 듣고 <그리스도...>가 문득 생각이 났다. 2000년 전에 갈릴리아를 떠돌던 예수는 우리 시대에도 다시 존재한다. 그들은 직감하지 않을까. 그 저항은 시작 전부터 실패라고(hopeless),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 없이(fearless) 걸어간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 덕분에 지탱된다. 문 국장은 그들을 통해 어떤 포근함을 느낀것일까

** 카잔키스키의 예수상은 니체의 예수상을 차용한것이다.
*** 문 국장은 그 예로 <한상균> 씨를 이야기 했다.

2016년 10월 9일 일요일

인간행동의 동기(2)

인간이 갖고 있는 그리 고상하지 않는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우리는 이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이 사회는 그래서 더 굳건하다. 인간의 천박함은 누구에게나 예상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일견 자연스러워보이기 때문이다. 즉, 악인들도 본인의 이해를 위해서는 이 시스템에 봉사한다.

하지만 닝겐들 중 전혀 다른 인간의 본성에 집중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협동, 증여 등을 통해 인간의 경제가 굴러갈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이들은 공동체적 호혜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경제'가 가능하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인간행동의 동기라는 차원에서 살펴보면, 인간은 '협력'을 통해 일을 할 수 있으며, 인간행동의 동기는 이기심, 공포심, 허영을 넘어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 아침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와 무엇인가를 벌이는 인간행동의 동기가 '사회적관습'이라는 이 주장, 고려해 볼만한가?

1. 이론적 타당상
   :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이론을 끌어들인다. 게임이론, 최근의 생물학 이론, 기업이론 등등. 하지만 대부분 이 이론들은 산발적이라는 게 내 인상이다. 이것들을 한 꼬챙이에 끼울 필요가 있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2. 현실적 유용성
   : 사회적경제는 그 자체로도 공격받을 수 있다. 착한 인간의 협력을 통한 경제는 아름다워보이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효율적 측면에서- 최악의 인간본성을 전제하여 최고의 효율을 올리는 시장경제가 사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경제 이론가들이 보는 인간의 본성은 아름답지만, 그 결과는 과연 흡족한가?

3. 그외 비판
   : 사회적관습이 인간행동의 동기라는 주장에서 '사회적관습'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그게 무엇인가? 시장경제의 명쾌한 답변에 대비하여 사회적경제의 사회적관습이란 답변은 너무 어정쩡하다. 이에 대해 사회적경제주의자들은 명확히 답변해야 할 것 이다.

인간행동의 동기(1)

차 밖의 풍경은 낯설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 힘으로 이렇게 곧은 도로와 솟아오른 마천루를 가지게 되었는가. 3-40년 전에는 논밭 밖에 없던 곳은 어떻게 상전벽해가 되었을까. 외계인이 물자를 공급한 것인가? 획기적인 물질이 발견된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신기루를 만들어냈다.

경제 시스템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게 만든다. 인간의 내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폐라는 마술 장치를 획득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한다. 화폐를 얻으려는 목적은 진정 다양하다. 그 목적을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속한 이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단추이다.

그 대답으로 첫번째- 이기심, 경제교과서는 이렇게 답변한다.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극대화된 효율은 이 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답변.

두번째, 공포심, 사람들은 이 이상한 사회에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우려, 화폐 없는 빈곤한 삶에 대한 두려움, 난간 없는 이 사회에서 결국은 '돈'밖에 없다고 결론 짓는다. 겁에 질린 그들을 온갖 공장으로 들어가게 하는 두번째 힘.

마지막으로 탐욕, 허영심. SNS를 보면 이 두 단어의 원뜻을 알 수 있다. 대신 이것은 소비에 관련된 자극제다. 공포심과 이기심을 통하여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는 탐욕과 허영심을 통해 소비된다.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러한 기묘한 특징을 자극하여 이 훌륭한 맷돌은 돌아간다. 그리고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종유석처럼 남아 있는 것들의 총합을 도시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전제와 가설에 다른 질문을 할 수는 없을까? 다른 사회, 즉, <다른 인간행동의 동기는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2016년 10월 7일 금요일

닝겐? 인간? 사람? 학습과 닝겐의 관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상한 질문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닝겐은 무엇인가. 닝겐은 특이하게도 두뇌활동을 통해 자연에서 살아남은, 아니- 생존을 넘어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는 뻔뻔한 상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인간의 삶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거의 한세대 정도의 기간을 '교육'을 받는 데 할애한다. 제도화된 교육이 없는 종(스피시즈)이 본다면 이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일에 사력을 다한다. 닝겐들은 이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지만, 이것은 사실 대단한 일이다. '학습'을 제도화하기, 그리고 이 학습 분류에 따라 닝겐들은 저들이 만든 사회에서 구분되고 분류되는 것 같다.

닝겐들은 가만히 앉아서 뭔가를 학습한다. 멀리서 보면 쉬는 것 같지만 그들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들이 보고 있는 종이에는 무엇인가 도트(Dot)화 되어 있는데, 이것을 마냥 쳐다보고 있다. 도대체 그들은 이것들을 보고 어떤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인가. 물리적 종이에 적힌 도트가 안구를 통해 뇌에 도달한다. 이 닝겐은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데, 새로운 관점을 얻기도 한다. 이 닝겐은 전혀 다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닝겐이 되어 가는 것인가?

닝겐의 언어를 살펴보면 '배우다', '안다'라는 표현이 많다. 뭘 좀 아는 인간은 그 무리에서 리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며, 뭘 좀 모를 것 같은 상징을 가진 인간은 그 무리에서 닝겐들이 서로 꺼리는 일을 할 가능성이 크다. 위에 것들을 보면 닝겐들은 '학습'이라는 것에 그들 삶의 목적을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참 이 상 한 종 이 다. 닝. 겐. 은.

거짓말

내가 하는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부담되기 때문이다. 뒤돌아 보니 어느새 세상에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다. 나는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색하지 않게 거짓말을 잘 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거짓말을 적당히 잘 하는 것은 능력이기도 하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의견을 요구하는 것이지 더 이상 진실을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견을 적당히 윤색하고 각색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스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