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다시 태어나도 우리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흥미로운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고승이 환생하여 다시 태어났다고 믿겨지는 임포첸과 그를 돌봐주는 나이 지긋한 승려. 승려는 어린아이가 임포첸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그리고 전생에 임포첸의 사원이라고 믿어지는 티벳까지 장장 3000킬로미터의 여행을 시작한다. 오로지 임포첸의 말을 믿고, 그를 위하여.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이 둘은 정상은 아니다. 어느 독일인의 감상처럼 어쩌면 둘은 정신이 나간 것일 수도 있다! 서양 이성의 눈으로 그들은 신화속 세계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고해 보면 대부분의 종교 창시자들은 이 임포첸과 그를 따르는 승려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합리적인 이야기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인간 내부에는 있다. 그런 모습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끊임없이 재현된다. 다만,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은 시대별로 달라진다. 예수나 무하마드가 현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영화의 주제는 물론 이러한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제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임포첸을 따르는 고승의 사려깊은 눈망울은 우리 시대가 오랫동안 잊었던 그 무엇이다. 담담히 이야기했던 고승은 임포첸과 결국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이 영화의 전부이다. 나는 그것을 쉽게 우정이고 사랑이라고 운운하지만- 이 고귀한 눈물은 그렇게 쉽게 범주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퍽 먹먹한 영화이다.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소환으로서의 종교 : 예수

세상사의 진리는 없다. 있다면 사람들 사이의 동의만 있을 뿐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의 옳고 그름, 선과 악, 미추는 사람들의 평균에 수렴한다. 일부의 엘리트들은 자신만의 전문성에서 그러한 상징체계를 정교화하고 대변할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 인간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신이란 개념 또한 그러하다. 속세를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의 정확한 개념을 나는 모른다. 다만, 나를 벗어난 사람들은 그러한 존재의 후보자를 알고 있고 그 중 하나는 예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비신자에게도 충분히 알려져 있다. 그를 잃은 12제자와 여인들의 고통은 2000년이 지나 우리에게도 알려져있다. 예수는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였으나,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개념을 고안해 내었고, 기독교전통에서 결국 '신'이라고 호명되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신의 개념을 다시 생각한다. 이제 우리 시대의 신은 교부학자들의 신과는 달라 보인다. 신의 존재는 토머스 아퀴나스 식의 논리적이고 귀납적인 논증으로 증명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이 존재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으면(사회과학적인 표현으로 간주관성)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시대는 묵시론적인 위험, 절망, 고통으로 넘쳐나니, 아마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인간들은 2000년 전에 숙명적으로 죽어간 한 인간을 기억해내고, 제도로서의 종교의 해설이 곁들여지면 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어떤 이는 죽음으로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예수는 죽었지만, 매순간 다시 태어나고 있으며 가톨릭 미사에서 이야기하듯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린다. 왜냐하면 매시대 인간들의 선택을 받기 때문이다. 신은 2000년전에 죽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소환된다. 그는 부활하며, 인간들은 스스로 그를 신이라고 <소환한다>. 그러한 믿음은 공고해지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하며, 역사에 참여한다. 그는 살아있는 누구보다도 영향을 끼치며 우리의 시대에 참여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신>의 개념이다.  박제되지 않고, 영원히 기억속에 남아 살아 있는 어떤 존재. 어찌보면 나는 예수가 진정 신이라고 믿겨진다.

2017년 11월 6일 월요일

좋은 글에 대한 단상(2)

모든 글쓰기는 상처에서, 열등감에서, 패배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누군가는 피로 쓰여진 것만 읽는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좋은 글은 쉽게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는 글은 선호하지 않는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 글을 쓸 수는 없다. 오히려 좋은 글은 그냥 써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은 그 자체적으로 씌여진다. 좋은 글을 구별하는 것은 쉽다. 좋은 글은 자체적인 생명력이 있다. 그 글은 작가와 엄격히는 다른 존재이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의 뇌는 사로잡힌다. 그 글은 자꾸 생각나고 불편하게 하고 고생시킨다. 25세기 뇌 과학이 발달되어 부분적으로 뇌를 바꿀 수 있을 때, 그들은 이해 할 것이다. 가장 좋은 뇌 수술의 메스는 좋은 글이라는 것을. 좋은 글로 인간 개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로 변해 갈 수 있다는 것을..

발레리안 : 프랑스적인 SF 영화

마블을 비롯한 미국의 영화제작자들은 어떤 공식을 만들어 낸 것 같다. 그 공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90년대 해리슨포드의 액션영화처럼 더 이상은 유치하지 않다. 재미있고 시간이 잘 가며, 약간의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그 약간의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은 철학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 너무 오락적이기만 한데?'라는 반문을 무마시킬 정도로만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스타일이 완성된 것 같은데, 최근의 여러 헐리우드 SF를 보면 이 생각은 더욱 확고해 졌다. 라그나로크, 가디언즈오브갤럭시 같은 영화들으르 보면 <미국적>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SF 영화에서도 문화적 다양성은 중요하다. 나는 보지 않았지만, 심형래의 SF영화인 용가리를 많은 한국인은 보았다. 그것이 설령 <국뽕>일지라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충무로는 SF 장르는 손 뗀지 오래되었고, 우리는 우아하게 용가리를 비평하였지만, 한국적인 SF는 동시에 고사되었다. 
   
이 지점에서 발레리안은 특징이 있는 SF 영화다. 이 영화의 특징을 나는 <프랑스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는 과잉된 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군더더기가 사라진-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계산된 미국식 SF와는 다르다.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고, 많은 장면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10,000원을 낸 관객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했으며, 사상과 그 사상의 느낌을 공유하려고 했다. 이것은 오히려 유럽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매일 버거킹의 익숙한 향만 맛다가, 맛있는 크로와상을 먹는 느낌. 물론, 이 영화는 크로와상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