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루 한번은 묵주기도를 하려고 노력한다. 영린이가 내년에 곧 변호사 시험을 보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지향하는 기도이다. 묵주기도를 하면 세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첫번째는 종교적 경험이다. 기도는 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오랜 전통은 그 기도조차 전형화 하는데 성공했다. 묵주기도에는 <신비의 기도>가 있다. 이 신비의 기도를 읽을 때 나는 종교적 냄새를 강하게 맡는다. 특히 <신비의 기도> 중 '영광의 신비'가 그렇다.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은 내게 이 파트는 신화처럼 느껴진다.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북한의 방송에서 나이 들은 중년의 앵커가 그들의 최고 존엄을 지칭할 때 꼭 이런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 존재는 뿌연 신화적 장치를 거두어 두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같다. 북한의 주민에게 김씨 일가가 그렇다. 가톨릭인들에게도 비슷한 매커니즘이 있다. 그 두 집단은 원치 않았겠지만, 서로 닮았다. 양 종교(북한, 가톨릭)의 기호학적 유사성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두번째는 명상적 경험이다. 묵주기도는 같은 기도문을 반복한다. 몇 번 하다보년 자동 크루즈처럼 아주 편하게 기도를 할 수 있다. 이때 나는 내 생각의 드나듬을 여실하게 본다. 그렇다. 나는 생각의 주체가 아니다. 생각은 어찌하여 나를 통과하여 반복한다. 어떤 생각은 반복되고, 어떤 생각은 강화되고, 어떤 생각은 점점점 소멸한다. 그 과정을 또 다른 나, 즉 메타 자아는 응시한다. 결국 인간의 생은 생각의 합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합의 미시적인 모습을 관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묵주기도는 적당하다. 일종의 만트람적 기능을 한다.
세번째는 인간적 경험이다. 나는 사실 신화나 종교를 믿는 인간은 아니다. 예전하는 그것들에 대해 유희하는 태도를 지녔었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묵주기도를 하면서 드는 확신이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확신. 강한 존재, 우리 주변의 강아지, 고양이, 기타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연약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기도를 한다. 그들의 상처와 욕망이 뒤범벅된 무엇을 투사하기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기도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맨얼굴을 본다. 그것은 아름답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한다. 기도는 나약한 인간을 전제하지만, 어떡하는가. 인간이기에 나는 기도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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